유럽연합(EU)이 '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CBAM)'을 2023년 10월부터 전환기(보고 의무) 단계로 시행한 데 이어, 2026년 1월부터는 실제 탄소 비용을 부과하는 본격 이행 단계에 돌입한다. 한국 수출 기업 입장에서는 사실상 새로운 관세 장벽이 생기는 것과 다름없다. EU는 세계 최대 단일 시장으로, 한국의 대(對)EU 수출 규모는 연간 600억 달러를 웃도는 만큼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CBAM의 핵심 원리는 간단하다. EU 역내 기업은 이미 탄소배출권거래제(ETS)를 통해 탄소 배출에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느슨한 탄소 규제를 받는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이 EU 시장에 저렴하게 들어오면 역내 기업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EU 외부에서 수입되는 제품에도 동등한 탄소 비용을 부과하겠다는 것이 CBAM의 골자다. 쉽게 말해, '생산 과정에서 탄소를 많이 배출한 제품일수록 EU에 팔기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현재 CBAM 적용 대상 품목은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 분야다. 이 품목들은 공교롭게도 한국의 대EU 수출 품목 상위권에 다수 포함돼 있다. 특히 한국 철강 업계는 대EU 철강 수출액이 연간 약 10억 달러 수준으로, CBAM의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알루미늄 역시 자동차·전기전자 부품 소재로 활용되며 EU 수출 비중이 적지 않아 업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CBAM 인증서 가격은 EU ETS 탄소 배출권 가격과 연동된다. EU ETS 탄소 배출권 가격은 최근 수년간 급등해 2023년 기준 톤당 60~100유로 수준을 오갔다. 예를 들어 탄소 집약도가 높은 철강 제품 1톤을 EU에 수출할 경우, 생산 과정에서 배출된 탄소량에 따라 수십 유로에서 수백 유로의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한국 철강사가 EU 경쟁사 대비 탄소 집약도가 높다면, 그만큼 가격 경쟁에서 불리해지는 구조다.
2023년 10월부터 시작된 전환기에는 실제 비용 부과 없이 수입업자가 분기별로 탄소 배출 데이터를 보고하는 의무만 지녔다. 그러나 2026년 1월 본격 이행 단계부터는 수입업자가 전년도 수입량에 해당하는 CBAM 인증서를 구매해 제출해야 한다. 이때 수출국에서 이미 탄소세를 납부했다면 그 금액만큼 차감 받을 수 있다. 한국은 2015년 탄소배출권거래제를 도입했으나, 무상 할당 비율이 높고 탄소 가격이 EU 대비 현저히 낮아 차감 혜택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국 수출 기업이 당장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탄소 배출 데이터의 정확한 측정·관리 체계 구축'이다. CBAM 보고 의무를 이행하려면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직접 배출량(Scope 1)과 일부 간접 배출량(Scope 2)을 EU가 정한 방법론에 따라 산출해야 한다. EU는 자체 방법론 외에도 일정 기간 제3국의 방법론을 허용하지만, 2025년 말까지만 인정할 예정이어서 기업들이 서둘러 EU 기준에 맞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우 자체 역량이 부족해 전문 컨설팅 지원이나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 제공이 절실하다는 목소리도 크다.
장기적으로 CBAM은 단순한 비용 부담을 넘어 한국 산업 구조 전반의 저탄소 전환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일부 선도 기업들은 CBAM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보고, 수소환원제철·재생에너지 활용 생산 공정 도입 등을 앞당기고 있다. 탄소 집약도를 낮추는 기업은 CBAM 비용 부담이 줄어드는 동시에 EU 시장에서의 브랜드 가치도 높아지는 이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결국 CBAM은 '탄소를 줄인 기업이 살아남는' 새로운 무역 질서의 신호탄으로 읽혀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대응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는 CBAM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기업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구체적인 실행 매뉴얼과 재정 지원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EU와의 협상을 통해 한국 탄소 가격 정책을 CBAM 차감 요건에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외교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2026년이 1년여 앞으로 다가온 지금, CBAM 대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경영 과제이자 국가 산업 정책의 핵심 현안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