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말 기준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 안팎으로 둔화되었지만, 체감 물가는 여전히 높다. 외식비·전세금·의료비 등 생활 밀착형 지출은 여전히 고공행진 중이다. 통계가 말해주는 숫자와 국민이 느끼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우리가 마주한 인플레이션이 단순한 경기 과열의 산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른바 '구조적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통적인 경제학 교과서는 인플레이션을 '너무 많은 돈이 너무 적은 상품을 쫓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 돈의 흐름을 틀어막으면 물가는 잡힌다. 실제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2022년부터 2023년까지 기준금리를 0.25%에서 5.5%로 끌어올렸고, 한국은행도 유사한 긴축 경로를 밟았다. 그러나 식료품, 주거비, 서비스 물가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금리라는 처방이 듣지 않는 인플레이션, 그 뿌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구조적 요인은 글로벌 공급망의 영구적 재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수십 년간 유지되어온 '저비용 글로벌 분업 체계'의 취약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후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각국은 핵심 산업의 자국 내 생산 또는 '우방국 이전(Friend-shoring)'으로 공급망을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등 전략 물자의 공급처가 다변화되는 과정에서 물류비와 생산비용은 구조적으로 상승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공급망 재편에 따른 글로벌 무역 비용 증가는 향후 10년간 소비자 물가를 평균 0.5~1.0%포인트 추가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두 번째는 기후 위기가 촉발하는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이다. 탄소 중립이라는 시대적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화석연료 투자는 급격히 줄었지만, 재생에너지 인프라는 아직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2021~2022년 천연가스 공급 충격이 전기요금 폭등으로 이어지면서 산업 전반의 생산비를 끌어올렸고, 그 여파는 소비재 가격으로 전이되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전기·가스 요금의 단계적 현실화 정책이 불가피해지면서 에너지 가격 인상은 제조업부터 외식업까지 모든 업종의 비용 구조를 흔들고 있다. 기후 전환 비용은 어떤 형태로든 소비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이 물가 하방 경직성을 강화하고 있다.

세 번째는 임금-물가의 악순환 고리다. 고물가가 지속되면 노동자는 실질 구매력 보전을 위해 임금 인상을 요구한다. 임금이 오르면 기업은 인건비 상승분을 제품가격에 전가하고, 다시 물가가 오르는 순환이 시작된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2018년 이후 빠르게 인상되어 2024년 시간당 9,860원에 달했다. 자영업·서비스업 중심의 한국 경제 구조에서 인건비 상승은 외식비, 배달비, 미용비 등 서비스 물가로 직결된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서비스 물가는 상품 물가보다 훨씬 느리게 하락하는 '하방 경직성'을 보이는데, 이는 일단 오른 임금이 쉽게 내려가지 않는 노동 시장의 특성과 맞닿아 있다.

네 번째 구조적 요인으로 인구 구조 변화를 빼놓을 수 없다. 생산 가능 인구 감소와 급속한 고령화는 노동 공급을 줄이는 동시에 의료·복지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린다. 일본은 이미 1990년대부터 인구 감소를 경험했지만 당시에는 글로벌 공급망 확장과 디플레이션 압력이 충격을 완화했다. 반면 지금의 한국은 인구 감소가 '공급망 재편+에너지 전환+임금 상승'과 동시에 진행되는 최악의 조합에 직면해 있다. 생산 현장에서는 인력난이 심화되고, 노인 의료비·돌봄 서비스 비용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이는 복지 재정 지출 확대로 이어지고, 결국 재정 인플레이션 압력을 추가한다.

이러한 구조적 인플레이션 앞에서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금리 인상은 수요를 억제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공급망 비용 상승이나 기후 전환 비용, 인구 구조 문제는 금리로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지나친 고금리는 기업 투자를 위축시켜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고, 장기적으로는 공급 측 물가 압력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결국 구조적 인플레이션에는 구조적 처방이 필요하다. 공급망 내재화를 위한 산업 정책, 에너지 전환 속도와 안정성의 균형, 생산성 향상을 통한 임금-물가 연동 고리 끊기, 그리고 저출생 대응을 포함한 노동 공급 정책이 총체적으로 맞물려야 한다.

물가 안정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정책 실패나 일시적 충격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 시스템 자체가 구조적으로 물가를 밀어 올리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매년 반복되는 '물가 잡겠다'는 정부 발표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단기 처방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구조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정직한 정책 로드맵과 사회적 합의다. 물가와의 싸움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며, 그 전장은 중앙은행 회의실이 아닌 산업 현장, 에너지 인프라, 그리고 인구 정책의 한복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