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400원 선을 넘나드는 이른바 '고환율 시대'가 장기화되고 있다. 2024년 하반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고금리 기조 유지와 한미 금리 차 확대, 글로벌 달러 강세가 맞물리면서 원화 가치는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4년 연평균 원달러 환율은 1380원대를 기록했으며, 연말 들어 1400원대 후반까지 치솟는 장면도 연출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환율 수준이 단기적 이벤트가 아닌 구조적 변화의 산물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고환율의 근본적 원인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꼽힌다. 첫째, 미국의 기준금리가 5%대 이상을 유지하는 반면 한국은 경기 둔화 우려로 금리 인하 압력을 받고 있어 양국 간 금리 차가 2%포인트를 웃돌고 있다. 둘째, 반도체·자동차 등 주력 수출 품목의 수출 회복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 흑자 폭이 기대치를 밑돌며 달러 공급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 지정학적 리스크와 중국 경기 둔화에 따른 글로벌 위험 회피 심리가 안전자산인 달러 수요를 부추기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미국 경제의 예외주의가 지속되는 한 달러 강세 기조는 2025년에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수출 중심 대기업들은 표면적으로 환율 상승의 수혜자처럼 보인다. 달러로 수취하는 수출 대금을 원화로 환산할 때 금액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요 전자·자동차 업체들은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수천억 원의 영업이익 개선 효과가 있다고 공시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다. 한 대형 완성차 업체의 경우 환율 100원 상승 시 연간 약 4000억~5000억 원의 환차익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 같은 숫자가 실질적인 이익으로 이어지려면 원자재와 부품 조달 비용 상승이라는 반대급부를 넘어서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수출 중소기업과 내수 기반 수입 기업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원유·천연가스·곡물 등 원자재 대부분을 달러로 결제해야 하는 중소 제조업체들은 환율 상승분을 납품 단가에 전가하지 못해 마진이 급감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가 500개 중소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62%가 '환율 상승으로 원가 부담이 증가했다'고 답했다. 수입 유통업체들은 환율 방어를 위해 선물환 계약 비율을 높이고 있지만, 헤지 비용 자체가 급등하면서 이중고를 겪는 실정이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는 '납품 단가 현실화 없이는 중소 수출기업의 채산성 악화가 구조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소비자 물가에 대한 파급효과는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수입 원자재 가격이 원화 기준으로 올라가면서 식품·에너지·의류 등 생활 밀착형 품목의 소비자 가격이 줄줄이 인상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한 시기를 전후해 수입 식품 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5~8% 상승했으며, 항공유 비용 증가를 이유로 주요 항공사들이 국제선 운임을 10~15% 인상했다. 밀·콩·팜유 등 국제 곡물가격은 달러 표시 기준으로 안정세를 보이더라도 원화로 환산하면 체감 가격이 크게 뛰는 구조다. 한국소비자원은 '원달러 환율 1400원 고착화 시 연간 가구당 수입 소비재 지출이 평균 30만~50만 원 추가로 늘어날 수 있다'고 추계했다.

해외여행과 유학·연수 비용 부담도 급격히 커졌다. 1달러당 1200원 시절과 비교하면 1400원 환율에서는 해외에서 1000달러를 쓸 때 20만 원을 더 지출하는 셈이다. 유럽 여행의 경우 유로화가 달러와 연동되는 경향이 있어 원화 약세의 이중 타격을 받는다. 자녀를 미국 대학에 유학 보낸 가정은 연간 학비와 생활비 5만 달러를 송금할 때 환율 차이만으로 1000만 원 이상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반면 외국인 관광객 유입은 늘어나는 긍정적 측면도 있는데,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고환율 기간 방한 외국인 소비액이 전년 대비 1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 당국과 한국은행은 급격한 환율 변동성 억제를 위해 시장 안정화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외환 당국은 쏠림 현상이 심화될 때마다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 개입)을 통해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으며, 국민연금과 외환보유고를 활용한 간접 개입도 병행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인하 결정 시 환율 불안을 핵심 변수로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자본시장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환율 1400원이 뉴노멀이 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경상수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을 최소화하는 구조적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2025년 환율 경로를 두고 '점진적 안정론'과 '고환율 고착론'으로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다. 낙관론자들은 미국 연준이 금리 인하 사이클에 진입하면 달러 인덱스가 하락하고 원화도 반등할 것이라고 본다. 반면 비관론자들은 미국 경제의 강한 성장세,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인한 달러 수요 지속, 국내 성장 동력 약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원화 약세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업과 가계 모두 환율 변동성을 상수로 받아들이고 장기적인 환 리스크 관리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는 데 의견이 모인다. 원달러 환율 1400원 시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체질과 대외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점검하라는 신호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