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한국은행은 2030년대에는 1%대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5%를 넘나들던 성장 엔진이 급격히 식어가고 있다. 이 숫자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하나로 수렴된다. 바로 '일본화(Japanification)'다.

일본화란 단순히 경제가 느리게 성장하는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저성장·저물가·저금리가 구조적으로 고착되고, 인구 감소와 자산 디플레이션이 맞물리면서 어떤 재정·통화 정책도 경기를 되살리지 못하는 만성적 침체 상태를 뜻한다. 일본은 1991년 부동산·주식 버블 붕괴 이후 30년 이상 이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명목 GDP는 1995년 5조3000억 달러에서 2010년대 중반 4조 달러대로 오히려 쪼그라들었고, 소비자물가는 20년 가까이 0% 안팎을 맴돌았다.

한국의 현재 지표는 섬뜩할 만큼 1990년대 초 일본을 닮아 있다. 합계출산율 0.72명(2023년 기준)은 일본이 저점에서 기록한 1.26명보다 훨씬 낮다. 가계부채는 GDP 대비 105%를 넘어 주요국 중 최고 수준에 속하며, 서울 아파트 가격은 연소득 대비 25~30배에 달하는 지역이 속출하고 있다. 일본 버블 붕괴 직전 도쿄의 주택 가격배율(PIR)이 18~20배였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한국의 자산 과열이 오히려 더 극단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기에 수출 주도 제조업 의존, 대기업 중심 경제구조, 내수 부진이라는 삼박자까지 겹쳐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의 미래다'라는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다. 일본화를 가속한 결정적 변수는 정책 실패와 구조 개혁 지체였다. 일본 정부는 버블 붕괴 이후 부실 금융기관 처리를 10년 가까이 미뤘고, 좀비기업 퇴출을 외면했으며, 노동시장 유연화와 여성·외국인 인력 확충을 번번이 유보했다. 반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라는 혹독한 충격을 통해 금융 구조조정과 기업 지배구조 개편을 이미 한 차례 경험했다. 위기 대응의 학습 효과가 존재한다는 점은 일본과의 중요한 차이다.

기술 혁신과 산업 전환 속도 역시 변수다. 한국은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분야에서 여전히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은 AI 인프라 투자 확대와 맞물려 향후 10년간 고성장이 전망된다. 1990년대 일본이 IT 혁명의 파도를 타지 못하고 아날로그 제조업에 안주했던 것과 달리, 한국은 디지털·AI 전환의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위치에 있다. 물론 이것이 구조적 저성장을 막아주는 '면역력'이 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면 한국이 진짜 피해야 할 함정은 무엇인가. 편집국이 보기에, 가장 위험한 것은 경제적 지표의 유사성이 아니라 '정책 결정 시스템의 경직성'이다. 일본이 장기 침체에 빠진 근본 이유 중 하나는 기득권 구조—대기업·관료·금융의 철의 삼각동맹—가 창조적 파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대기업 계열사의 시장 지배력, 규제 혁신을 가로막는 관료주의,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청년 창업과 혁신 생태계를 억누르고 있다는 지적은 10년째 반복되고 있다. 경고는 충분히 나왔다. 이제 실행의 문제다.

인구 문제만큼은 솔직해야 한다. 이민·출산장려 정책이 단기간에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은 통계학적 사실이다. 2024년 출생아 수가 24만 명 선을 지키지 못했다는 잠정 집계는, 2040년대 생산가능인구 급감이 피할 수 없는 구조적 현실임을 뜻한다. 그러나 인구 감소 자체가 저성장의 '유일한 원인'인 것처럼 프레이밍하는 것은 위험하다. 1인당 생산성이 높아지면 인구가 줄어도 1인당 소득은 증가할 수 있다. 일본의 실패는 인구 감소가 아니라 생산성 정체에서 왔다는 분석이 주류 경제학계의 지배적 견해다.

결국 한국 경제의 일본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가계부채 연착륙, 부동산 시장의 점진적 정상화, 서비스업 생산성 향상, 노동시장 유연·안정화, 그리고 인구 위기에 대응한 이민 정책 현실화라는 다섯 가지 과제는 이미 누구나 아는 답이다. 문제는 이 개혁들이 모두 기득권의 저항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일본은 '알면서도 하지 않는' 30년을 보냈다. 한국이 같은 길을 걷느냐 아니냐는, 결국 이 사회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용감하게 구조 개혁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저성장은 피할 수 없는 중력이 아니다. 하지만 개혁을 미룰수록, 그 중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