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2018년 미·중 무역전쟁으로 점화된 공급망 갈등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심화됐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에너지·곡물 공급망마저 지정학적 무기로 전락시켰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글로벌 상품 교역량 증가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자유무역의 황금기는 사실상 막을 내렸고,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과 '니어쇼어링(near-shoring)'이라는 새로운 공급망 재편 논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한국의 처지는 구조적으로 복잡하다. 한국은 전체 수출의 약 20%를 중국에 의존하면서도 첨단 기술과 핵심 부품 조달 면에서는 미국·일본과의 협력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이중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으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ASML에, 핵심 소재 상당 부분은 일본에 의존한다. 배터리 분야도 마찬가지다. 양극재 원료인 리튬과 코발트의 상당량은 중국 정제 과정을 거치는데,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해 중국산 부품·소재를 사용한 배터리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한국 배터리 업계가 수조 원을 투자해 북미 현지 공장을 짓는 것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의 핵심 키워드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trusted partner)'다. 미국은 반도체과학법(CHIPS Act)을 통해 520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편성하고, 자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유치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전자가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 건설을 결정하고, SK하이닉스가 인디애나주에 38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것은 이 흐름에 올라탄 결과다. 표면적으로는 한국이 미국 주도 공급망에 성공적으로 편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면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남는다. '기술 주권'을 미국에 얼마나 내어줄 것인가,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옳지 않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며, 요소수 대란(2021년)에서 보듯 중국의 특정 품목 수출 제한 하나가 한국 물류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 중국은 희토류 생산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으며, 갈륨·게르마늄 등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소재의 수출 통제를 이미 시행 중이다. 한국이 미국 편에 섰다고 해서 중국이 즉각적인 경제 보복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사드(THAAD) 배치 이후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이 한국 문화·관광·유통 산업에 남긴 상흔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 복잡한 방정식을 풀지 못한 채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도박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 하는가. 필자는 한국이 '전략적 불가결성(strategic indispensability)'을 핵심 외교·산업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진영도 한국 없이는 공급망 완결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한국이 유일하게 공급할 수 있는 기술과 소재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현재의 메모리 반도체 우위는 수년 내 중국의 추격으로 흔들릴 수 있다. 시스템 반도체, 첨단 패키징, 고체전지, 차세대 디스플레이 등 대체 불가능한 기술 영역을 선점하는 것이 시급하다. 둘째, 공급망 다변화의 주체가 돼야 한다. 단순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동남아·중동·아프리카 등 신흥 공급망 거점에 한국이 먼저 진출해 인프라와 기술을 이식함으로써 새로운 '한국형 공급망 허브'를 구축해야 한다.
유럽의 사례는 시사점이 크다. 독일은 공급망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나라 중 하나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55%에 달했던 독일은 에너지 공급망이 무너지자 경제 전반이 흔들렸고, 2023년 국내총생산(GDP)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반면 프랑스는 원자력 발전 비중을 꾸준히 유지하며 에너지 자립도를 지켜낸 덕분에 상대적으로 타격이 작았다. 공급망 다변화와 자립 역량은 위기가 닥쳤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난다. 한국이 지금 투자해야 하는 것은 위기 이후의 회복력이 아니라 위기를 예방하는 구조적 내성이다. 이를 위해 희소 자원의 비축 체계를 강화하고,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율을 실질적으로 높이는 장기 로드맵이 필요하다.
정부와 산업계, 그리고 정치권 모두가 공급망 재편을 단기 외교 이슈가 아닌 국가 생존 전략으로 인식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공급망 정책은 부처별로 분산돼 있고, 컨트롤타워 기능이 취약하다는 지적이 반복되고 있다. 미국에는 국가안보회의(NSC) 산하에 공급망 전담 조직이 존재하며, 일본도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해 반도체·배터리·의약품 등 11개 전략 물자의 공급망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국도 이에 상응하는 통합적 거버넌스 구조를 갖춰야 한다. 기업의 해외 공급망 실사와 리스크 공시를 의무화하고, 정부-기업-연구기관이 정보를 공유하는 협력 체계를 제도화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공급망 재편의 파고는 이미 한국 해안에 밀려오고 있다. 중립을 가장한 모호함은 더 이상 선택지가 될 수 없다. 한국은 기술력과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숙련된 제조업 역량이라는 강점을 지닌 나라다. 이 자산을 활용해 누구도 배제할 수 없는 '필수 파트너'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불확실한 세계 질서 속에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가장 현실적이고도 능동적인 전략이다. 역사는 공급망의 주도권을 쥔 나라가 다음 시대의 패권을 선점했음을 반복적으로 증명해왔다. 한국이 그 역사의 수혜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관찰자에 머물 것인지는 지금 이 순간의 결단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