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의 지형이 흔들리고 있다. 2018년 미·중 무역전쟁의 서막을 시작으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촉발한 공급망 충격,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최근 미국 행정부의 고율 관세 부과 조치까지—일련의 사건들은 세계화 시대에 구축된 '효율 중심 공급망'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공급망 단절로 인한 글로벌 경제 손실이 GDP의 최대 7%에 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세계는 '가장 싼 곳에서 만들어 가장 싸게 파는' 논리 대신,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에서 만든다'는 새로운 원칙 아래 재조직되고 있다.

이 재편의 핵심 키워드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과 '니어쇼어링(nearshoring)'이다. 미국은 반도체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첨단 산업의 자국 또는 동맹국 내 생산을 강제 유도하고 있다. 유럽연합 역시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을 통해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공급망 다변화를 법제화했다. 중국은 이에 맞서 희토류·흑연·갈륨·게르마늄 등 핵심 광물의 수출을 통제하며 맞불을 놓고 있다. 세계는 사실상 두 개의 공급망 블록으로 갈라지는 '디커플링(decoupling)' 혹은 최소한의 '디리스킹(de-risking)'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의 처지는 그 어느 나라보다 복잡하다. 한국의 최대 수출 상대국은 중국(2023년 기준 약 19.7%)이며, 동시에 안보 동맹의 근간은 미국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정부로부터 중국 내 반도체 설비 투자를 제한받는 동시에, 미국 애리조나와 텍사스에 수십조 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도록 압박받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배터리 3사는 IRA의 첨단제조세액공제(AMPC) 혜택을 받기 위해 미국 현지 생산을 확대하는 중이다. 경제와 안보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구조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두 강대국 사이에서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미국 주도의 공급망 블록에 전면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 동맹국 간의 연대가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이 주장은 현실의 절반만 본다. 한국의 대중 수출 감소는 이미 가시화되어 2023년 한 해 동안 대중 무역수지가 180억 달러 적자로 전환됐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화학 산업에 있어 핵심 생산기지이자 소비시장이다. 중국을 단번에 끊어내는 전략은 수출 의존형 한국 경제에 심각한 충격을 줄 수 있으며, 이는 정치적 구호가 경제적 현실을 압도하는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반대로 중립을 표방하며 양쪽 모두에 줄을 대는 '헤징(hedging)' 전략도 한계가 명확하다. 인도·베트남·인도네시아 등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이 전략을 구사하지만, 이들은 대규모 내수 시장과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고유한 강점을 지닌다. 한국은 이미 고임금·고비용 구조로 진입했고, 기술 집약적 산업에서 경쟁 우위를 찾아야 하는 국가다. 어정쩡한 중립은 양쪽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결국 어느 공급망에서도 핵심 역할을 얻지 못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에게 필요한 것은 중립이 아니라 '전략적 불가결성(strategic indispensability)'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이 주목해야 할 것은 자국이 보유한 비대칭적 기술 우위다. 한국은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 2위(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점하며 전 세계 시장의 약 70% 이상을 공급한다. 배터리 분야에서도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20~25%를 한국 3사가 차지한다. 조선 분야에서는 HD현대·한화오션·삼성중공업이 LNG 운반선·암모니아선 등 친환경 고부가 선박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이 기술들은 미국도, 중국도, 유럽도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렵다. 한국은 이 '대체 불가능성'을 외교적 협상 레버리지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의 공급망 전략은 세 가지 축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첫째, 핵심 기술의 국내 기반을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이 불가피하더라도, 연구개발(R&D)과 핵심 공정은 국내에 남겨두는 '본국 중심 분산 구조'를 법·제도로 뒷받침해야 한다. 둘째, 특정 국가에 대한 소재·부품 의존도를 낮추는 공급망 다변화를 가속화해야 한다. 호주의 리튬, 캐나다의 니켈, 인도네시아의 니켈·코발트 등 핵심 광물 자원 외교를 자원 안보 차원에서 국가전략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셋째, 인도·베트남·멕시코 등 신흥 제조 허브와의 산업 협력을 통해 '제3의 공급망 축'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이 기술을 공급하고, 신흥국이 생산 역량을 제공하는 상호보완적 구조는 한국을 공급망의 설계자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공급망 재편은 한국에게 일방적 시련이 아니다. 냉전 종식 이후 최대의 지경학적 변화는 동시에, 기술 강국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의 주변부에서 핵심부로 도약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회는 전략이 없으면 위기로 변한다. 미국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거나, 중국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전략적 표류'는 한국이 피해야 할 최악의 선택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담대한 전략적 선택과, 그 선택을 실행할 국가적 의지다. 폭풍이 몰아칠 때, 닻을 내려야 하는 곳을 정확히 아는 나라만이 살아남는다.